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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UGOUT Interview] 이범호 MEMORIES

dugout*** (dugout***)
2019.09.15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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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 이름은 ‘호랑이꽃’ 이범호

 

유니폼을 벗고 뜨거운 햇볕을 쬐다 여우비를 맞으니 찬란했던 지난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익숙하지 않은 관중석에 앉아 내 자리였던 그라운드를 보니 20년이란 긴 시간을 보냈던 이 푸른 잔디가 왠지 서글프게 느껴졌다. 삶의 전부를 걸고 지켰던 야구장. 이곳에서 연속 615경기에 출전했고 329개 홈런을 때려냈으며 1,127타점을 뽑았다. 아직도 ‘이범호’를 외치는 함성이 귓가에 맴돌아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했다.

 

Photographer 박경식 Editor 표권향 Location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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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야구인생을 보상받다

 

“안녕하세요. 한 달 차 일반인 이범호입니다.”

 

예전과 달리 요즘 아침을 일찍 시작하는 이범호다. 불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전날 경기에 대한 피로 탓에 해가 중천에 떠서야 기지개를 켰던 그다. 하지만 요즘 그의 생활패턴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침에 서둘러 일어나 아들의 등원 길을 배웅한다. 아직 방학인 딸은 개학 후 학교 앞까지 데려다줄 계획이다. 아직 실감 나진 않지만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간 한 가정의 남편이자 아버지인 이범호의 이야기다.

 

다른 점은 딱 한 가지다. 얼마 전까지 광주를 들었다 놨다 했던 유명인 ‘아들’이 집에 있다. 바쁜 일정으로 마주 앉아 다과를 즐길 시간조차 없었던 ‘남편’이 아내와 함께 장을 보러 간다. 잦은 출장으로 얼굴 보기 힘들었던 ‘아빠’가 가족여행을 계획했다. 누구에게는 평범하지만 그에게는 항상 꿈꿔왔던 꿀 같은 시간이다.

 

그런데… 평온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왠지 가슴 한편이 허전하다.

 

“출근 안 해도 된다는 것이 조금 서글프기도 하다. 남자가 직업이 있어야 하고 나가야 하는데 나갈 데가 없어 심심하다. 항상 몸을 비비고 살았던 사람이 집에만 있어야 하니 편하면서도 뭔가 허전하다.” 배부른 투정 같지만 그에게는 현실이다.

 

지난 7월 13일 광주-기아챔피언스필드에서 이범호의 은퇴식이 열렸다. 이날 그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 하기 위해 야구장을 가득 메운 만원관중이 그의 이름을 외쳤다. 이범호의 등번호 ‘25번’을 새긴 유니폼을 입은 소속팀 KIA와 축하와 아쉬움을 담은 꽃다발을 준비한 입단팀 한화가 뜻을 모아 그의 프로 생활에 마침표를 함께 찍어줘서 더욱 특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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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례없는 특별한 은퇴식이었다. 그 감동이 남달랐을 것 같다.

프로야구 선수 중에서도 몇 안 되는 성대한 은퇴식을 치른 것 같다. 그렇게 크게 해주실지 몰랐는데 정말 감사드린다. 관중석에서 보니 많은 팬이 응원해줬던 느낌이 새록새록 나는 것 같아 좋다.

 

은퇴식 입장 요금을 25% 할인된 가격으로 판매했다.

이화원 사장님이 아이디어를 내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만큼 떠나는 선수를 위해 많은 관중들이 들어올 수 있게끔 배려해주신 것이다. 덕분에 2만 명이 넘는 분이 모여 성대하게 은퇴식을 치렀다. 뜻깊었고, 아무나 생각할 수 없는 일인데 사장님이라 가능했던 것 같다. (웃음) 굉장히 감사드린다.

 

양현종이 이범호 선배와 같이 아름답게 은퇴하고 싶다고 했다.

(양)현종이는 더 아름답게 은퇴할 거다. 54% 할인해주지 않을까? 이 팀에서 20년이란 시간을 더 보낼 것이고 광주의 자랑이기도 하다. 아마 현종이도 기대하고 있지 않을까? 54% 할인해줄 것이고 영구결번이 될 것이다. (웃음) 현종이는 가장 멋지고 좋은 선수로서 은퇴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아직 10년은 더 있어야 하니까 200승도 하고 2000삼진도 잡으며 오래오래 선수 생활을 했으면 좋겠다.

 

사실 이적생 아닌가. KIA에서 공을 세웠던 것에 대한 보답을 받은 것 같다. 최고의 예우를 갖춘 은퇴식이었다. 날짜는 본인이 구단에 요청한 것인가.

그렇다. 한화와의 경기에서 하는 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구단에서 내 의견을 잘 받아줬고 많은 것을 이룰 수 있게 큰 은퇴식을 해줘서 진심으로 감사하다. 날짜는 주말에 한화전이 없어서 7월로 당겨진 것 같다. (시기가 더 늦어졌을 수도 있었겠다?) 8월이나 9월 주말 경기가 있었다면 조금 더 늦춰졌을 수도 있다. 그때는 한화와 경기가 없어 최선의 선택을 했던 것 같다.

 

고별사가 즉석 멘트였다. 소감을 전할 때 머리와 마음으로 무슨 말을 전하고 싶었는가.

많은 분, 나와 야구했던 분들에게 인사하고 싶었다. 후배들, 친구, 선배와 코치진에게 모두 인사하면서 마무리하는 것이 뜻깊은 고별사라고 생각했다. 좋은 말들을 많이 해주니까 내 마음 속에 있던 진심들을 꺼내 인사했다.

 

“지도자 생활을 어디서 하겠는가. KIA를 떠날 수 없다”라고 했는데 이 뜻은 무엇인가.

지도자를 시작해야 한다면 시작은 KIA에서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은퇴식을 열어준 구단에서 9년이란 시간을 뛰었던 이범호라는 선수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약속이자 상황이 아닌가 싶다.

 

한화가 섭섭해하진 않을까.

KIA에서 은퇴식은 물론 모든 것을 이뤘다. KIA에서 시간을 보내고 다른 팀들에게 연락이 온다? 지도자로서 이곳을 떠나야 한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여기서 해야 하는 것이 맞다. 다른 팀들도 나와 같이 생각하고 있지 않을까? 어떤 팀이든 어떤 선수든 많은 노고가 있는 팀에서 시작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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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은 시간에 비례하지 않는다

 

2000년 신인드래프트를 앞두고 김주찬과 함께 유격수 최대어로 꼽혔다. 당시 대구고였던 이범호는 예상과 달리 한화의 부름을 받았고, 삼성은 충암고 출신 김주찬을 지명했다. 고향을 떠나 타지생활을 하게 된 데다 3루수로서 집중훈련을 하게 된 이범호는 어찌 된 일인지 “만세”를 불렀다. 이 길이 바로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중학교 때까지 유격수를 본 이범호는 사실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3루수로 옮겼다. 이상하게도 3루수와 잘 맞았다. 스텝부터 내야수로서 퍼즐을 맞췄을 때 유격수보다 3루수에 더 어울렸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3루수로서 시간을 보냈던 것이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인 것 같다고 그는 말한다.

 

2000년대 김동주, 2010년대 최정과 박석민에게 다소 밀리는 감이 없진 않았지만 역대 3루수 가운데 레전드로서 손색이 없는 화려한 플레이를 펼쳤다. 2005시즌에 이어 2006년에도 3루수 부문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그의 이름은 일본야구까지 알려졌다. 그렇게 그에게 러브콜을 보낸 구단이 있었으니 바로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다.

 

하지만 일본 생활이 쉽지 않았다. 캠프지에서 서서히 몸을 만드는 우리나라와 달리 스프링캠프 시작과 동시에 베스트 플레이를 선보여야 하는 경쟁구도가 낯설었다. 첫 경험에서 보여줘야 한다는 생각이 강할 수밖에 없었던 이범호는 한꺼번에 훈련강도를 높였다. 하지만 ‘급히 먹는 밥이 체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한 번도 아프지 않았던 어깨에 탈이 났다. 시작부터 꼬여버린 것이다.

 

악의적인 소문도 퍼졌다. 중심타자 호세 오티스가 무릎부상으로 이탈해 외국인 슬롯 1자리가 비어 8월에서야 1군 엔트리에 들었다. 2경기 연속 홈런을 때리며 마쓰다 노부히로를 좌익수로 밀어내고 3루수를 차지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수비와 침묵한 타격으로 아키야마 코지 감독과의 불화설이 일었다. 이범호의 영입을 원하지 않았던 아키야마 감독이기 때문에 주전 확보가 어려울 것이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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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뱅크 입단 후 경미한 어깨 부상 등으로 계획에 차질이 생겼었다. 심리적으로 부담이 컸을 것 같다.

어깨를 다치고 나니 모든 면에서 특히 송구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소극적인 플레이를 한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와 달리 수비 범위가 좁은 것이 아니냐는 말을 들었다. 첫 바늘을 잘못 꿰서 일본 생활이 그렇게 마무리된 것 같다.

 

개막전부터 지명타자 혹은 대타로 경기에 나갔다. 벤치에 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아쉬웠다. 같은 상황에 붙었으면 해볼 만하다고 생각한 경기들이 있었다. 그래도 많은 것을 눈으로 보고 느끼고 내가 공부할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내 것으로 만들며 선수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언젠간 시합을 뛰는 날이 올 것이라는 생각으로 공부했다. 하지만 나에게 주어진 출장시간이 짧았다.

 

아키야마 감독과 사이가 안 좋았다고 하던데. 관계 때문에 더욱 불편했을 것 같다.

감독님과 그렇게 사이가 안 좋았던 것 같진 않다. 잘해주려고 노력했던 감독님이다. 배울 점이 많았다. 기존에 뛰고 있던 선수들이 워낙 잘했고 외국인 선수라는 것 때문에 자리가 정해져 있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잘하고 있는 일본 선수들을 빼고 들어갈 수는 없지 않은가. 외국인 선수다 보니 제한이 있었다. 생각하지 못했던 암초였다.

 

시즌 종료 후 보류명단에 포함됐다. 기분이 참담했을 것 같다.

내가 선택했던 길이지 구단에서 결정한 것은 아니다. 내가 그만하겠다는 말을 전했다. 계약기간이 2년이었기 때문에 더 있을 수 있었는데 느낌이 왔다. 다른 FA 선수들과 전력보강으로 일 년 더 그런 상황 속에서 쉬고 싶지 않았다. 그냥 ‘야구하러 가자! 시합 뛰러 가자’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한국에 오고 싶었다. 외국인 선수 신분이 아닌 우리나라 선수들과 경쟁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번 은퇴도 그렇고 떠날 때를 본인이 결정하는 것 같다.

조금 더 있으면 어떤 상황이 올지 아는 것이다. 추해지는 상황이 오기 전에 한 발 더 먼저 정리를 빨리빨리 하는 편이다. 조금 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하는 것보다 결정할 때는 빨리 탁! 결정하고 ‘이건 맞다, 이건 아니다’는 끝나고 난 뒤에 결정하는 성격이다. 그래서 남들보다 빠른 선택을 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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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인생을 열어준 타이거즈

 

2010시즌 종료 후 우선 보류명단에 포함된 이범호는 구단 측 보유 의지가 약하다는 언론 보도를 접했다. 거취가 불안정한 상태에서 떠난 스프링캠프에서도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이범호는 소프트뱅크에 양해를 구하고 원소속팀 한화와 여러 차례 교섭을 진행했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원만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협상이 결렬됐다.

 

이유는 복잡했다. 이범호가 전 소속구단인 한화로 돌아가지 않으면 풀어주지 않겠다는 것이 소프트뱅크의 입장이었다. ‘무조건’이라는 전제조건이 붙었다. 한화 역시 우리 구단이 아니라면 이 시기만큼은 한국프로야구에 복귀하기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리하여 신경전이 시작됐다.

 

이범호는 점점 지쳤다. 부상으로 지친 몸을 억지로 일으켰는데 마음에까지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다시 일본에 남겠다고 어렵게 결정을 내렸다. 그랬더니 소프트뱅크 측에서 어느 구단이든 갈 수 있다며 자유를 허락했다. 갑자기? 어리벙벙했지만 어쨌거나 그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때 처음으로 손을 내민 구단이 바로 KIA였다.

 

한화 입장에서는 배신감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KIA로서는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당시 부상 병동이었던 타선에 무게감을 실어준 단비 같은 존재였다. 최희섭까지 덩달아 좋은 성적을 이루니 이를 ‘이범호 효과’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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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소속구단이 아닌 다른 팀으로 간 최초 사례였다.

좋은 쪽으로 생각하고 싶다. 어떻게 보면 내가 필요하지 않은 상황이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KIA가 나를 더 높게 평가했을 수도 있다. 나를 가장 필요로 하는 구단이 어딜까 라고 생각했다. KIA가 나를 전 소속팀보다 더 좋은 선수로 인정해줬기 때문에 이 팀에서 다시 선수 생활을 할 수 있었고 그것을 알기에 결정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나에게 가장 먼저 얘기해준 KIA가 나와 가장 맞겠다고 생각해 뒤도 안 돌아보고 선택했다.

 

KIA를 통해 국내에 복귀했는데 개막전이 하필 한화전이었다. 타석에 들어섰을 때 엄청난 야유가 있었는데.

팬들은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고… 모든 것을 두고 원소속팀이 아닌 KIA로 왔다는 것에 대해 크게 실망했을 것이다. 한화에 있을 때 많은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당연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KIA에 있는데도 많은 사랑을 보내줬다. 누구든지 소속팀을 끝까지 못 끌고 가면 팬들에게 아쉬움을 남기기 때문에 그런 일이 생기는 것 같다.

 

반대로 KIA는 대환영이었다. 타선에 직격타를 맞은 KIA를 살렸다. 어떤 각오로 합류했었나.

야구가 너무 하고 싶었다. 일 년 동안 거의 벤치 생활하면서 야구에 대한 간절함과 그리움이 컸던 시기였다. 다른 생각 없이 어떻게든 경기를 뛰고 싶다는 생각이 컸다. 많은 팬을 보유한 명문구단 타이거즈에 와서 팀이 1등을 달리니 모든 것이 금상첨화였다.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흘러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사람은 좋을 때 늘 조심해야 한다는 교훈도 그 시즌에 느꼈다. 그때 부상만 아니었으면 당시 투수진과 공격력이 좋아 그해 우승을 할 수 있는 팀 컬러와 성적이었기 때문이다. 아쉬웠던 시즌이기도 하다.

 

두 번째 FA도 KIA와 재계약했다. 개인적으로 잘 맞는 팀이 있다던데 그 구단이 KIA인가.

그랬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으면 우승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운이 좋은 시기에 KIA라는 팀을 만나 최고의 전성기를 보낼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전 팀에서 못 이뤘던 것들을 KIA에서는 많은 것들을 이뤘다. 내가 못 했던 부분을 이 팀이 잡아줬고, 이 팀에서 부족했던 부분을 내가 잘 커버했던 것 같다. 서로가 좋아지는 상황을 만들었기 때문에 몇 년간 우승도 하며 좋은 성적을 냈던 것 같다.

 

하지만 올해 2월 햄스트링 손상 이후 은퇴를 시사하듯 힘든 나날을 보냈다.

올 시즌까지는 선수 생활을 하고 싶었다. 이제는 분위기가 젊은 선수들로 많이 바뀌었고, 올라가서 내가 추구하는 야구를 못 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떠나는 것을 결정함으로써 젊은 선수들에게 기회가 주어질 것이고, 나 때문에 엔트리 구성에 힘들어할 감독님도 생각해야 했기에 선택의 시간을 가졌다.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팀이나 후배들에게 도움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계속 따라다니면서 엔트리 한 자리 잡아먹는 것보단 확실하게 정리하여 젊은 선수들에게 길을 열어주는 게 선배로서 더 맞다고 판단해 결정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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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시작이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선수 생활을 좋게 마무리한 것처럼 좋은 선수들을 양성할 수 있도록 공부할 계획이다. 후배들에게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 몸으로 익히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려고 한다. 다른 분야에서도 야구와 관련된 부분이 있다면 이를 접목해 연구하는 좋은 지도자가 되도록 노력하겠다.

 

마지막으로 20년을 함께 보낸 팬들에게 인사 부탁한다.

은퇴식을 한다고 했을 때 가장 걱정했던 부분이 팬들이 얼마나 올까였다. 25% 할인을 해준다고 해도 오기 싫으면 안 오지 않나. (웃음) 많은 팬이 모였을 때 내가 더 잘했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시간을 통해 감사와 소중함을 느꼈다. 지금 열심히 준비하며 잘 준비하고 있다. 야구장 밖에서도 KIA 타이거즈를 많이 응원하고 있다. 많은 것을 공부하고 준비해 그라운드로 돌아오는 날까지 기다려주시면 감사하겠다.

 

***

‘꽃범호’. 처음에는 놀리는 느낌이 들었다. ‘왜 나한테 이런 별명을 지어주나’라는 안 좋은 생각을 했다. 그런데 은퇴식 그라운드를 장식하는 흩날리는 꽃들을 보고 선수생활을 하면서 꼬리표처럼 붙었던 별명이 떠올랐다. 9월 1일의 탄생화 호랑이꽃의 꽃말은 ‘나를 사랑해주세요’다. 슈퍼스타로 성장할 때도, 길 잃을 뻔 했지만 그 과정을 이겨냈던 날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것 같다. 이범호는 이 별명과 함께 기억될 날들이 많을 것이라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꽃범호’는 ‘꽃보다 아름다운 이범호입니다’란 뜻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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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16 2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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